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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율 컬럼] 신앙의 힘:시사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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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율 컬럼] 신앙의 힘

시사앤피플 | 기사입력 2023/05/30 [20:48]

[이승율 컬럼] 신앙의 힘

시사앤피플 | 입력 : 2023/05/30 [20:48]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전,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5월 29일 아침 조간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 인생에 주어진 '신앙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보다 인간의 신념과 행동을 지배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생각할때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장 힘있고 지속적인 성향을 보이는것은 '신앙 그 자체의 힘'이란 점에 주목하게 된다.


조선일보에 두 분의 신앙적 삶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다. 먼저 지난 26일 향년 89세로 별세하신 강원희 선교사에 대한 기사를 인용해 보자.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그는 196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이듬해 강원도 무의촌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의료봉사를 하다가 청년 시절 꿈꾸었던 선교인생의 꿈을 버리지 못해 1982년 49세 늦은 나이로 네팔 해외선교의 길을 떠났다. 그후 40년 가까이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저개발국가이며 불교가 성행하는 지역에서 남다른 헌신을 해 왔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잠 잘 시간을 쪼개 현지 언어를 배우는등 열정적이었으며, 더구나 현지 극우 불교신자들로 부터 생명에 대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초지일관 인도주의적 박애와 겸허한 태도로 위기를 넘긴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의사로서 실력이 없으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생각에 틈나는대로 귀국해 모교와 대형병원에서 새로운 의료기술을 익힘으로서 후배 의료선교사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연세대 간호대 출신으로 캠퍼스 커플로 만난 최화순 여사가 "우리도 남들 처럼 그냥 보통사람들 처럼 살 수 없느냐"고 했을 때, " 꼬리도 머리도 아닌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며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했다는 이야기는 해외선교사들의 집회시 자주 등장했던 유명한 말이다.

필자가 대외협력부총장으로 사역을 했던 연변과학기술대학(중국 연길, YUST)에 교육선교사로 왔던 젊은 교수들이 한결 같이 간증하며 인용한 말이 바로 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운데 토막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필자도 젊은 교수들의 그 한마디에 이끌려 그들의 '소명의식'에 동화되고 또한 그들의 꿈과 비전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지금껏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중국(YUST)과 북한(PUST)을 넘나들며 교육자로서의 길을 계속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2011년 4월 당시 여든을 앞둔 강원희 선교사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 영화 <소명 3ㅡ히말라야의 슈바이처>(감독 신현원)가 개봉되었다.


의료선교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한 모습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영화는 3만명이 넘게 본 관객들에게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필자도 그 영화를 보고 참으로 소중한 영적 되새김을 경험한 바 있지만, 자기 피를 뽑아 환자에게 수혈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등 강원희 선교사의 이러한 이타적 헌신의 '이웃사랑'은 그후 조금도 변질됨이 없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함께 지속적으로 승화되어 '거룩한 섬김과 나눔'으로 이 시대 우리들 마음에 청량한 샘물처럼 솟아 오르고 있다.

이제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 선교사님을 떠나 보내며, 그의 선교적 유업이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수가 되어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병든 취약계층 뿐만 아니라 우리 '죽은자 같은 기득권자들의 이기심'의 벽을 허물고 세상을 새롭게 살리는 '거룩한 힘(Divine Power)'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한량없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조문합니다.

"학폭으로 죽은 아들 묻고 일군 명문( )---용서의 힘이 복수의 힘 앞서더라" 조선일보 월요(5/29) 인터뷰의 제목이다. 다름아닌, 지난 26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서울예술고등학교 개교70주년을 맞아 개관한 서울아트센터 이대봉 이사장에 관한 기사다.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설 수 있는 무대와 1084석 객석, 최첨단 음향시설을 갖춘 서울아트센터는 예술의 전당, LG아트센터에 버금가는 강북권 명소가 될 전망이다. 이 건물이 서기까지의 사연이 극적이다.
2010년 도산 위기에 빠졌던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한 이대봉(82) 참빛그룹 회장의 심중에는 남다른 각오와 결단이 있었다. 그는 서울예고 성악과 1학년에 다니던 16세 아들을 학교폭력으로 잃었다(198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이 다니던 학교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그 아들의 꿈이 자라던 학교를 문닫게 내버려 둘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카톨릭신자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코자 가족을 설득하여 끝내 쓰러져 가는 학교를 되살려 놓은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때 상황을 묻는 기자에게 이 회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요. 아들을 죽인 원수의 학교에 왜 돈을 투자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우리가 죄 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 위한 일이라고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아들의 꿈'을 되살리기 위해 나중에 아들의 이름을 딴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35년 동안 3만여 명 학생들을 도왔으며, 대웅 군 사건 이후로 서울예고를 학폭이 급감한 모범 학교로 세우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또한 서울대에 가장 많이 진학하는 학교로 매년 1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력 이전에 훌륭한 인성을 가진 연주자가 되고 건강한 체력을 겸비하도록 가르쳐 전인적인 예술인으로 키우는데 늘 앞장 서 왔다. 이런 연고로 된 일일까? 세계에 이름을 드날린 조성진, 임윤찬, 박세은 등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은 이대봉 회장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꿈을 되살린 거룩한 열매들이 되었다. 이러한 일은 미래세대를 위한 희망과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 여겨져 그의 행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손양원 목사님(1902ㅡ1950)이란 분이 계신다. 그는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한자명으로 표기할것)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은 우익 학생 단체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사건이다. 두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안재선)를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이를 말리거나 격분한 애향원 환자들과 가족을 설득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몸소 실천하는 거룩한 사랑의 도를 보여 주셨다.


그후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지역으로 진격해 왔을 때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 없다면서 끝까지 애향원에 남았다. 그후 그는 북한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1950년 9, 28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필자는 서울아트센터 이대봉 이사장의 기사를 보며 언뜻 손양원 목사님을 떠 올렸다. 상황과 사건의 형태는 다르지만 아들을 잃은 어버이의 심경을 갖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 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때 두 분의 경우에 공통분모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순화되고 승화된 '신앙의 힘'이 원천임을 깨닫게 한다. 조선일보 기자는 끝으로 짖궂은(?) 질문을 또 던졌다.

"살아 있다면 52세인데,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는 많이 잦아 들었나요?"
"어느 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내 몸을 때리며 울어요. 아이를 생각하면 그날의 울분이 지금도 용솟음치죠. 그래도 저는 용서하는 마음이 복수하는 마음을 앞선다고 믿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라고, 어려운 이웃 도울 수 있게 돈을 벌 수 있는 거라고, 대웅이도 천국에서 기뻐할 거예요"

지면을 통해 참으로 눈물겨운 간증과 신앙심을 들었다. 필자는 연변과기대 사역을 지원하는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 관계자들이 참빛그룹 이대봉 회장께서 백두산 천지 입구에 호텔을 세우고 또 해란강 강가에 36홀 골프장을 세워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사업건을 투자한 기업으로 참빛그룹을 내 세웠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중국 조선족의 후대를 위하여 연변 자치주에 가장 큰 규모의 교육사업을 투자해온 단체가 바로 연변과기대임을 늘 자랑스럽게 공지해 왔다. 필자가 언젠가 연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을 기념하는 한 행사에 참여 했을때 잠시 만나 인사한것이 유일한 대면이지만 그후 중국에서, 또 한국에서 그의 위명을 접하게 될때 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업인으로 큰 귀감이 되기에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집안 형편으로 그만두고 부산에 가서 신문 배달, 부두 하역, 고물상같은 막노동 일을 했던 그가 마침내 항공화물업(동아항공화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고, 그후 참빛가스산업 등 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중국 조선족자치주 뿐만아니라 베트남에도 진출하여 호텔, 골프리조트를 운영하는 등 입지전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의 '인간승리'와 '명문인생'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힘'이 그 비결임을 깨닫는다. 부산에서 막노동하던 열아홉 살 때 "성당에 가면 옥수수떡을 준다"고 해서 찾아 갔던 그 길이, 아들을 죽인 원수같은 학교를 인수하여 마침내 세계일류음악학교로 거듭나게 했으며, 나아가 국내 최고급의 서울아트센터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데 새로운 희망과 믿음의 그루터기가 되도록 인도해 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생의 서사(敍事)요 '거룩한 헌신'의 여정임을 드높이는 일이 되었다. 이대봉 이사장님의 남은 인생에 더 큰 영광과 '참빛'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감격사회 5월 30일자 컬럼)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전,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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