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피플] 세계질서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동안 유럽각국에서의 극우파 득세, 영국의 유럽공동체 탈퇴, 미국의 트럼프현상 등으로 진행되어 오던 일련의 변화과정이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미국의 파격적이고 일방적인 관세인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세계질서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 같다. 어떤 전환점을 지나 변화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냉전시대에 미국중심 진영에서는 경제면에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을 통해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다. 미국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고, 상품교역과 금융거래에서 글로벌 단일시장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 질서가 지금 도전받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질서, 곧 「팍스 아메리카나」를 앞장서서 깨뜨리고 있는 게 미국이라는 점이다. 왜 그럴까. 질서유지와 시장유지에 따른 부담이 커서 그런 것일까. 이와 다른 해석은 「팍스 아메리카나」는 어차피 붕괴될 국면에 처했기 때문에, 미국이 새로 전개될 다극화세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질서변화의 뿌리는 이민문제와 기술혁신에 따른 소득양극화다. 둘다 정치경제적 분석을 필요로 한다. 이민은 노동력의 이동이다. 이민자들은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이동한다. 그런데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 사람들은 이민자들과 경쟁해야 되기 때문에 박탈감과 위협을 느낀다. 미국과 유럽 중산층의 상대적 지위가 추락하면서 이들을 대변하는 극우성향의 정치세력이 떠오르고 있다.
사실 중산층 퇴조의 근본원인은 이민의 유입보다 기술혁신으로 인한 소득양극화에 있다. 기술혁신은 인류의 전반적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평등사회 구현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회가 혁신기술에 적응하는 과도기에는 소득이 양극화되어 불평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노동력이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종으로 이동하는 데는 한 세대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정보통신 기술혁신은 40년 동안 지속되어 보통 30년으로 잡는 한 세대를 넘어섰다. 소득양극화가 해소되는데 필요한 쉬는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다. 전통적 제조업 기술에서 앞선 나라인 일본이 장기침체에 들어가 있고, 역시 제조기술의 강자인 독일이 침체국면에 들어서고 있는 것도 기술혁신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정보통신 등 선도 산업에서 혁신기술을 추격하는 데 공을 들여 상대적 지위가 많이 올라섰다. 전통적 선진국인 유럽국가들은 복지제도를 잘 갖추고 있어 혁신에 따른 양극화를 해소하는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체계가 잘못 설계되어 혁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복지만 앞서게 되어 성장의 동력을 잃었다.
낙천적인 남유럽국가들이 먼저 이 함정에 빠지고, 복지제도가 원래 강했던 북유럽에 이어 이제 유럽의 중심에 있는 프랑스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유럽은 이제 정신차려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나토의 유럽화를 위한 국방예산 증액도 감당해야 한다. 한국은 다행히 아직 혁신동력을 잃지 않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다극체제에서 한국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경제력뿐만 아니라 문화전파력으로 소프트파워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경기부양 등을 구실로 인기영합적 정책이 남발되면 기존 선진국들이 거쳐간 쇠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관세인상 정책은 실패한 정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여파는 세계질서 재편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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